조선왕릉기행 - (여주) 세종대왕릉(영릉, 英陵)
여주에는 두 영릉이 있다. 하나는 꽃부리 영 자를 쓴 英陵이고, 나머지 하나는 편안할 영 자를 쓴 寧陵이다. 각각 세종대왕과 효종의 능이다. 이 두 능이 같은 공간에 서로 가까이 있어 '여주 영릉과 영릉'이라고 하는데, 업적이 워낙 위대한 세종의 인지도가 효종과는 비교가 불가할 정도기에 지도 앱뿐 아니라 관리하는 기관의 이름도 세종대왕릉 / 세종대왕유적관리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혼동을 피하기 위해 영릉(英陵)을 이야기할 때 '세종대왕릉'이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한다.
세종대왕릉까지 가는데는 자동차를 이용했는데, 한적한 지방 도로를 달리는 느낌이 무척 좋았다. 차를 타고 들어가게 되면 가장 먼저 주차장을 확인할 수 있는데, 구리 동구릉에 비해 주차공간이 매우 넓고 깔끔하여 누구나 마음 편히 주차를 할 수 있는 환경이다. 주차 요금은 무료이며, 정기 휴일인 매주 월요일에는 주차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차에서 내려 입구 방향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관람객을 반기는 곳은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이다. 세종대왕과 관련된 전시를 하고 있는 곳인데, 날씨가 추운 관계로 세종대왕릉 관람을 마치고 들어가 보기로 하였다.

오백 원의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로 많은 정비를 한 것으로 보였는데, 잘 정리된 깔끔한 경관이 참 보기 좋았다. 들어서자마자 마스크를 뚫고 느껴지는 신선한 소나무 향이 기분을 참 좋게 해 준다.

이곳에서 전반적으로 받은 인상은 ‘깔끔함’이었다.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주차장에서부터 관람 구역 내 화장실, 유적 곳곳의 조경까지 굉장히 신경 써서 잘 관리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게다가 원래 위치에 재실을 복원하며 근처의 나무와 길을 새로 닦은 느낌이 들었는데, 누군가는 다소 인위적이거나 너무 새것 느낌이 나서 안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탁 트인 깔끔함이 결코 싫지 않았다. 구리의 동구릉과 비교하자면 동구릉은 기존에 남아있던 것들을 잘 관리해나간 느낌이고, 세종대왕릉은 거기에 끊임없이 원형을 복원하며 세련됨을 더한 느낌이다(유적관리소에 따르면 2014년부터 ‘영·영릉 유적 종합정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재실이 나온다. 재실은 제사를 주관하는 헌관과 기타 필요한 인원들이 머물고, 제사에 쓰이는 기구 등을 보관하고 관리하던 곳이다. 세종대왕릉의 재실은 1970년대에 복원되었으나(현재 ‘구 재실’이라고 부름), 그 위치가 조선시대 재실이 존재하던 곳과 조금 달라 현재는 새로운 재실을 원래의 위치에 새롭게 복원하였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두 개의 재실을 만나볼 수 있다. 구 재실은 들어가 볼 수 없지만, 50년가량이 지난 만큼 꽤 고즈넉한 한옥의 느낌을 주고, 최근 복원된 재실을 나무의 색부터가 새것 느낌이 풀풀 풍긴다.


아직은 새것 느낌이 많이 나지만 복원은 굉장히 신경 써서 잘 이루어진 것 같아 보였다. 실제로 아궁이에 불을 때서 난방을 하는 온돌까지 제대로 재현해 놓은 것인지, 땔감을 때운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곳이 원본을 복원한 것을 넘어 앞으로도 오랫동안 실제 재실로써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살아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재실을 지나 쭉 걸으면 드디어 영릉이 보인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함께 잠들어있는(합장) 곳이다.

홍살문을 지나 능으로 가는 길은 사진에서 볼 수 있듯 돌(박석)로 되어있고,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이 향로, 오른쪽의 낮은 길이 어로이다. 향로는 향과 축문을 들고 지나는 길이고, 어로는 능을 찾은 왕이 지나는 길이다. 이 길을 걸으면 내가 정말 조선왕릉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자각을 지나 봉분을 향해 걸었다. 동구릉에서는 봉분 바로 앞까지는 가지 못했던 것 같은데, 영릉은 솔길을 따라 봉분 바로 앞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해놓았다. 덕분에 그 옆에 자리한 석물들을 구경할 수 있어 좋았다. 위엄 있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단순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석물을 보면 조선 사람들의 미적 감각에 감탄하게 된다. 힘을 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닌데, 너무나 쉽게 그것을 해낸 느낌이다. 요즘 우리를 둘러싼 디자인에서는 비록 미니멀리즘을 표방한 작품이라도 이 석물들이 주는 편안함을 느끼기 쉽지 않은 것 같다.


세종대왕 영릉을 전체적으로 둘러보고 입장할 때 지나쳤던 세종대왕역사문화관에 들어갔다. 세종과 관련된 여러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자녀가 많았던 세종대왕의 식구들에 대한 것도 있었다. 해가 갈수록 낮아지는 출산율에 정부가 골머리를 앓고 다자녀 가정에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고 있는데, 세종이 2020년의 대한민국에 산다면 다둥이 아버지로 방송 출연 꽤나 하지 않았을까.
한글 창제를 비롯해 4군 6진 개척, 장영실의 기용을 통한 과학 발전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세종의 업적에 관한 전시가 계속된다. 그중 음악을 다룬 부분이 인상 깊었는데,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서부터 접할 수 있는 정간보를 만든 것 역시 세종이다. 음의 길이를 표현할 수 있는 동양 최고(最古)의 유량악보라는데, 어떻게 한 사람이 문자를 발명해내고 악보 시스템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물리학에서는 뉴턴(Newton)이 미적분학에 이어 고전역학을 정립한 위인으로 추앙받는데,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세종은 그 이상이다. 이런 지도자를 우리 역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다.
조선의 음악과 관련된 공간에서 전통 악기들도 만났다. 호랑이 모양을 한 악기는 '어(敔)'인데, 견죽이라고 하는 도구로 등을 긁으면 소리가 난다. 음악을 끝내는 신호를 주는 악기이다.

ㄱ자 모양의 돌이 주렁주렁 달린 악기는 편경이다. 세로획과 가로획의 비율에 따라 음의 높낮이가 달라진다. 음을 한번 조율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단단한 돌로 만들어져 다른 악기와는 달리 음이 습도나 온도에 의해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으로 국악에서 음을 잡는 표준 역할을 수행한다고 한다.

편경과 같은 삶을 살 수는 없을까. 무슨 일을 하든 처음 시작할 때는 굉장한 외로움과 고통이 있겠지만, 결국 정교하게 조율된 단단한 돌이 되어 뒤이어 같은 일을 할 누군가의 기준이 된다는 것. 무척 어렵겠지만 지향해볼 만한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이 모인 곳을 가면 불안한 요즘인데, 영릉은 너무나 완벽한 휴식을 선물해 주었다. 계절이 변할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일 영릉을 여러 번 찾고 싶다. 여주의 한편에서 항상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영릉을 방문해 다들 편한 쉼과 새로운 영감을 많이 받고 돌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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